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미시마 유키오 (문단 편집) === 유년기 및 학창시절 === [[파일:external/1.bp.blogspot.com/Mishima_HighSchool.gif]] ▲ 가쿠슈인 고등과 재학 시절 일본의 대문호들 중에선 단연코 '''최고 수준 집안에서 [[금수저]]를 물고 태어났다.'''[* 물론 다른 대문호들 중에도 부모가 대지주나 사업 성공을 한 부유층 자녀는 꽤 있었지만, 미시마 쪽은 '''부, 명예, 권력 셋 다 가진''' 완벽한 상류층이라 그네들과는 수준이 달랐다. 오죽 최고 수준의 금수저였으면 어릴 때부터 교사들뿐 아니라 교장까지도 학생인 그의 눈치를 봤을 정도다. [[다자이 오사무]] 정도가 그나마 금수저로서 미시마와 비교할 만 하지만 그래도 미시마에 비하면 급이 떨어진다.] 미시마 유키오의 집안은 조상 대대로 권력이 있었다. 그의 외가 조상 중에는 홋카이도 [[에조 공화국]]의 하코다테 지사였다가 메이지 시대의 고위공무원까지 된 나가이 나오유키도 있었다. 친가와 외가 모두 고위공무원이나 귀족 집안이다. 조부 시절부터 관료 집안으로 조부인 히라오카 사다타로(平岡定太郎, 1863~1942)는 제국대학(現 [[도쿄대학]]) 법학부를 거쳐 관료가 되었다. 참고로 증조부 히라오카 타키치(平岡太吉, 1833~1896)는 에도막부 시절 히메지번에 속한 하리마국(現 [[효고현]])의 농민이었으나 아들 둘이 메이지 유신을 거치면서 뛰어난 머리로 단숨에 상류층으로 신분상승하였다.[* 단 신분이 상류층이 된 것이지 이 사람은 넓은 땅과 많은 돈을 가진 부농이었다. 또한 고리대금업으로도 큰 돈을 벌었기도 하다. 신분은 농민이었어도 돈은 많았으니 자식 둘을 공부에 전념시킬 수 있었던 것.] 참고로 미시마 유키오의 큰 할아버지인 히라오카 만지로(平岡萬次郎)도 변호사 겸 정치인으로 제국의회 [[중의원]] 의원 4선을 했었다. 할아버지는 [[일본 제국 내무성|내무성]] 관료로 후에 17대 [[후쿠시마현]] 지사와 [[가라후토청]](樺太庁)[* 일본이 [[러일전쟁]]에서 승리하여 가져온, 북위 50도 이남 남[[사할린]] 지역을 다스리던 관청이다.] 장관까지 지낼 정도로 고위 관료가 되었다. 또한, 부친인 히라오카 아즈사(平岡 梓, 1894 ~ 1976)도 도쿄제국대학 법학부를 거쳐 [[고등문관시험]] 수석 합격을 했는데, 그런 이들이 대개 초일류 관청인 [[일본 재무성|대장성]](한국의 [[기획재정부]] 격)에 간 것과 달리 이류 부처인 농림성(한국의 [[농림수산식품부]] 격)에 가긴 했으나 성내 최고위직인 수산국장까지 올라간 고위관료였다. 거기에 변호사 자격증도 가지고 있던 엘리트였다. 할머니 나가이 나쓰(永井なつ, 1876 ~ 1939)[* 홋카이도 에조공화국 설립에 참여한 나가이 나오유키의 직계 증손녀라고 한다. 나가이 나쓰가 어렸을 때 증조할아버지는 무려 에도막부 후반기와 메이지 유신 초반기의 권력자 중 하나였다. 막상 나오유키는 에조 공화국때 망하면서 항복하게 생기자 할복자살을 하려다가 포기했다고 한다. 사실 에조공화국 설립은 엄연히 심각한 쿠데타라서 그들이 항복한 뒤에 법대로 다 죽였어야 했지만, 그들이 항복하자 희한하게도 메이지 덴노는 공화국 설립자들의 능력을 높이 사서 용서만 한게 아니라 중요한 관직을 주었고 권력자로 만들어 주었다. --근데 뭔놈의 집안이 자살을 이렇게 많이-- 단, 나가이 나오유키 자체는 하급영주의 서자이자 중급사무라이인 하타모토 계급의 양자였기에 어떤 귀족 적통 집안 같은건 아니다. ]는 무가 집안 출신으로 아버지는 대심원판사(大審院判事)[* 대심원은 근대 일본의 최고 사법기관으로 전후 일본의 [[최고재판소]]로 이어진다. 한국의 대법관쯤 되는 높은 자리에 있었던 셈이다.], 어머니는 아나호번(宍戸藩)의 번주인 마쓰다이라 요리타카(松平頼位)의 서녀였기에 상당한 귀족집안 출신이었다.[* 이런 집안배경 때문에 남편 사다타로를 은근히 무시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남편 역시 귀족만 아니지 결코 꿀리는 집안이 아니었음에도.] 귀족적인 배경을 가진 할머니는 미시마의 어린 시절 엄격한 훈육과 과보호를 했다고 한다. 미시마의 어머니인 시즈에(1905 ~ 1987)는 한학자이자 [[카이세이 중학교]](開成中学校)[* 현재는 일본 최고의 명문 고교로 불리는 [[카이세이 중학교 · 고등학교|開成中学校・高等学校]]의 전신이다. 근대 일본의 교육 시스템은 독일의 것과 비슷하여 중학교가 현재의 고등학교 격이었다.]의 교장을 지낸 하시 겐조(橋 健三, 1861 ~ 1944)의 둘째 딸로 문학적인 재능이 뛰어난 여자이었다. 미시마의 아버지인 히라오카 아즈사가 카이세이중학교를 거쳐 [[구제고등학교|구제제일고등학교]](現 도쿄대학 교양학부)를 거쳐서 도쿄제국대학에 입학했던 인연으로 혼인하였다. 미시마 유키오는 어릴 때부터 몸이 병약했는데 또래 친구들이 한창 뛰어놀 나이에도 몸이 약해서 아침조회를 하다가 살짝 어지러워 쓰러진 적도 몇번 있었다. 결국 병원에 찾아가자 의사가 직사광선을 웬만하면 피하라고 권고했다고 한다. 원래 당시에도 고위관료였던 할아버지 빨로 학교에서도 교장이나 평교사 할 것 없이 신경 쓰던 학생이 기미타케였는데, 이 의사의 진단 이후로 할머니가 학교에 직접 찾아가 교장선생에게 "몸이 약한 우리 기미타케에게 태양볕을 맞아야되는 아침 운동장 조회 같은 것은 앞으로 절대 시키지 말라." 하고 면전에서 강하게 요구했고, 당연히 그때부터 미시마 유키오는 모든 선생님들의 보호를 받으며 운동장 조회를 공식적으로 다 빠졌다. 가뜩이나 왜소한 데다가 건강도 안 좋은데 의무적으로 햇빛도 자주 피하고 살다보니 얼굴색이 항상 새하얗다 못해 창백하기로 유명해서, 미시마를 안 좋아하던 아이들 사이에서 별명이 "창백"이었다고 하는데, 그러나 명문가 집안의 가오를 잃지 않겠다는 신념이 있었는지, 당시 유키오의 동창들이 훗날 증언한 바로는 못된 아이들과 시비가 붙어도[* 물론 권세 있는 가문의 아이를 폭행했을 리는 없으니, 물리적 충돌은 없었던 것이고 그저 기싸움 개념으로 말로만 시비를 자주 걸었던 모양이다. 그와 관련된 많은 기록에 초등학생 시절에 주먹다짐을 했다는 기록은 없다.] 기세에 밀린 적은 없었다고 전해진다. 초등학교 6학년 때 덩치 크고 짓궂은 반 애가 방과 후 집에 가려고 하던 미시마 유키오에게 "야, 창백이, 넌 [[불알]]도 창백하지?"라고 놀렸다고 한다. 그러자 화가 난 유키오는 기세 좋게 바지 단추를 풀어 그것들을 꺼내 "봐라! 봐!"라고 하면서 당당히 공개했다고 한다. 그래서 당황한 그 아이가 뻘쭘해져서 말도 제대로 못하고 어버버하다가 집에 갔다고 한다.[* 미시마 유키오의 어릴 때부터 친구이자 화가인 미타니 마코토가 훗날 미시마 유키오에 대해 쓴 회고록인 "급우(친구), 미시마 유키오"에 나오는 내용이다. 미타니 마코토가 당시 옆에서 그 사건을 보면서 느꼈던 회고의 글은 "남색 교복 배경에 튀어나온 그것이 체격에 비해 생각보다 커서 놀랐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